서지마을 소개
원주교구 순교복자
복자 최해성 요한
1811년 ~ 1839년 9월 6일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복자 최해성 요한은 최양업 신부님의 부친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가까운 친척으로, 충청도 청양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출신입니다. 박해를 피해 서지마을로 이주하여 교우촌의 회장으로서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1839년 1월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강원감영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극심한 고문과 회유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최해성 요한은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며 굳건히 신앙을 지켰습니다.
1839년 9월 6일, 마침내 순교의 날이 다가오자 최해성 요한은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라며 마지막 남은 재산으로 잔치를 베풀고 순교하셨습니다. 2014년 8월 16일 복자로 시복되셨습니다.
복자 최 비르지타
1783년 ~ 1839년 12월 8일
“그렇습니다. 참으로 틀림없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최 비르지타는 최해성 요한의 고모입니다. 남편 유씨가 배론으로 피신하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도와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최 비르지타는 남편을 따라가 함께 살았습니다. 이후 남편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서지마을로 돌아왔습니다.
1839년 조카 최해성 요한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최 비르지타는 조카를 만나기 위해 강원감영으로 갔습니다. 감옥을 지키던 관원들이 “너도 천주교 신자이냐?”라고 묻자, 최 비르지타는 “그렇습니다. 참으로 틀림없는 천주교 신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으로 최 비르지타는 옥에 갇혀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관장은 그녀를 굶겨 죽이려고 4개월 동안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죽지 않자, 결국 옥졸들이 그녀의 목을 졸라 1839년 12월 8일 순교하셨습니다.
최 비르지타가 순교할 때 그녀의 몸은 환하게 빛나고,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2014년 8월 16일 복자로 시복되셨습니다.
김강이(金鋼伊) 시몬
1765년 ? ~ 1815년 12월 5일
복음을 전하며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고
원주 강원감영에서 순교한 순교복자
김강이 시몬은 서지마을에 살지는 않았지만, 원주 강원감영에서 순교하셨고 2014년 복자로 시복되신 분입니다.
김강이 시몬 복자는 충청도 서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고상하고 용맹하였으며, 재산도 많았습니다. 장성하여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모든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습니다.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이 고산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피신을 다녔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 김 시몬은 등짐장사를 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장사를 그만두고,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울진에 정착하였습니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자 김 시몬은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후 원주의 강원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극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배교하지 않자,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강원감영의 관찰사는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김강이는 신자들에게 천주교 서적과 소식을 전해 왔으며,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혀서 온몸으로 깊이 빠져 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에 김 시몬은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깊어 옥사하였습니다. 그때가 1815년 12월 5일이었습니다. 2014년 8월 16일 복자로 시복되셨습니다.